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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에피소드(1) - 무선호출기(삐삐)

대학 새내기 시절, 그때는 무선호출기(삐삐)가 한창 유행이었다.

 

"삐삐 쳐~"가 인사였고, 지금의 "카톡 해~"와 동일했다.

 

상대방 '삐삐' 번호로 유선 전화를 걸면, 여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호출하시려면 1번, 음성을 남기시려면 2번을 눌러주세요~"

 

1번을 누른 후, 보통은 내가 수신 가능한 유선 전화(집 전화 또는 당구장, 술집) 번호를 남긴다.

(응! 무선 호출기는 숫자만 누를 수 있다!!) 

 

그러면, '삐삐' 받은 사람은, 공중전화나 집 전화 등을 통해 '삐삐'에 표시된 숫자대로 전화를 걸고

"(내 뒷번호 4자리를 말하며) 삐삐 치신 분 부탁합니다."라고 말하면서 통화가 시작된다.

 

만약, '삐삐' 호출한 사람이 전화를 바로 받지 않았다면 "XXXX 호출하신 분~" 하고 찾은 후, 호출자와 통화하게 된다.

 

'통화는 간단히'가 매너였고, 공중전화 박스에 길게 늘어선 풍경도 많이 볼 수 있었다.

간혹, 공중전화를 기다리던 사람과 전화 사용자 간의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고 뉴스에 나올 만큼 불상사가 있기도 했다.

 

전화번호 호출 기능은 요즘 이모티콘 또는 이모지를 대신하기도 했다.

 

8282 (빨리빨리)

1004 (천사, 사랑하는 애인)

10102 3535 (열렬히 사모합니다.)

44444... (죽어라)

18181818... (욕)

 

또, 2번을 눌러 상대방의 음성 사서함에 메시지를 남길 수도 있다. 혼자 일방적인 이야기를 쏟아낸 후, 저장을 하거나 취소할 수도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취소 기능이 여럿 살렸다. 취중 옛 애인에서 실수를 할 뻔한 일들을 방지한다거나..)

 

착신자의 음성 호출기(삐삐)로는 '삐삐' 하고 음성(그래서 삐삐다) 또는 진동을 통해 새로운 메시지 도착을 인지한다.

공중전화나 집 전화기를 통해 자신의 음성사서함에 전화를 걸어 비밀번호를 입력한 후, 녹음된 음성 메시지들을 듣는 식이다.


고3을 통과하면서 대학 입학과 함께 삐삐를 장만했기에 대부분의 친구들은 삐삐를 가지고 있었다.

 

함께 입학한 동기들은 연일 벌어지는 술자리에서, 공강 시간(강의와 강의 사이 비는 시간) 당구장에서, 그리고 수업시간 출석 체크하며 서로의 얼굴들을 익힌다.

낯선 어른 흉내와 함께 레몬소주를 털어 넣던 주점과 처음 가보지만 익숙한 척 으스대며 출입했던 당구장, 담배를 배우면서 한 까치씩 주고받으며 친해지던 중이었다.

 

1학년 1학기 첫 중간고사 시간, 그것도 교양 수업 중간고사!

긴장감 돌던 고등학교와 달리, '설마 이렇게 대 놓고 하는 커닝도 가능해?' 하하호호 시험을 본다.

책을 펴 보는 사람, 옆 사람과 상의하는 사람, 시끌시끌.. 통제 불능.. 전공 수업 시험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시험 기간에도, 새로 나온 펜티엄 컴퓨터가 얼마나 좋은지... 3.5 인치 디스켓 박스 2 ~ 3개에 불법 게임, 야한 사진 등을 서로 주고받는다.

(쓰다 보니, 복학왕에 나오는 기안대학교 같다. 좋은 학교는 아니어도 나쁜 학교도 아니다.)

 

그런 시험 중, 교양 과목 중 하나인 '화학' 시험이 시작되었다.

 

대부분 학생들은 당연히 공부하지 않았는데 시험 감독관 조교분들이 심상치 않다.

고등학교 시험 시간 분위기다. 

 

"집중! 커닝하면 바로 F입니다."

 

여기저기 수군수군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 뒷자리 같은 과 친구들의 소곤거림이 들린다.

"XXX 야. 시험 빨리 풀고 답을 나한테 삐삐 쳐~"

 

아직은 어색한 사이라 서로의 부탁을 외면할 순 없다. 집단에 속하는 게 중요하니까..

 

분위기는 당나라 군대 분위기였으나, 그래도 성실한 친구들은 어디에나 있다.

 

하나, 둘, 시험 답안지를 교탁에 제출하고 가방을 들고나간다.

삼삼오오 모여 시험과 게임에 대해 떠들며 헤어지기 아쉽지만 딱히 갈 곳도 없어 서성대던 늦은 오후.. 큰소리의 절규를 모두가 들었다.

 

야! 삐삐 치라니까, 답을 음성 녹음하면 어떻게~

 

일순간, 모두 뒤집어졌고.. "뭐야뭐야?", "뭔데?" ... 그리고 큰 웃음 소리.. 설명과 웃음의 반복이었다.

그날의 사건은 우리 학번 전설의 에피소드 중 하나가 되었다.

 

시험장에서 객관식 답 번호를 기다리던 친구에게, 밖에서만 확인 가능한 음성 녹음을 한 것이었다.

 

공부한 친구의 얄미운 대응이었을까? 아니면, 익숙지 않은 신문물 활용의 미숙함이었을까?

난 그때, '삐삐'를 친 친구의 표정도 보았고, 어이없음에 소리친 친구의 표정도 보았고, 함께 모여서 참을 수 없이 계속 웃던 친구들의 표정도 보았다.

 

그날의 늦은 오후 공기 냄새와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어제 먹은 점심 메뉴보다 더 선명하다.